29 아침, 내몽골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선교사님과 공원을 나가기 위해 이른 아침 6시에 깨어났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마치 밥을 먹고 바로 뛰었을 옆구리가 아픈 그러한 느낌이었는데, 통증이 위가 아닌 심장 아랫부분에서 느껴졌다. 과일과 함께 아침을 간단하게 때우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수를 하다가 코를 풀었는데 피가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언제 코피가 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짧아도 3년간 코피가 적이 없었다. 홉스굴 차강노르를 다녀오고 여기 후흐허트에 이르기까지, 일주일 동안 100시간이 넘도록 이동해왔다. 특히 푸르공이나 말을 타며 이동할 때에는 너무 오랜 시간 흔들리며 이동을 해왔던 것이다. 특히 말을 때에는 몽골인들은 델에다가 띠를 매는데, 작년 나를 가르쳐 주었던 몽골 교수님이 말하기를, 이는 말을 때에 신장이 오랜 시간 흔들리면서 아프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한 용도라고 했다. 수업을 들을 적에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몽골에 와서야 그것을 이해할 있게 되었다. 사실 이를 깨달은 시점은 후흐 허트를 떠나고 한참 지나서였는데, 처음에는 맹장이 터진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걸어 다닐 했다. 나는 예정대로 선교사님과 함께 강가의 공원으로 나갔다.




정부 청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공원에 중앙에는 해맑은 인민들의 동상과 장기 말들로 꾸며져 있었다. 건너편에는 높은 고층 주거 건물들이 늘어져 있었다. 강을 따라 공원길을 조성이 되어 있었는데, 한국 수도권의 다른 공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조깅을 하지는 않지만 아침에 조깅을 하기에 좋은 공원이었다.



적당히 걷고 정부청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부청사 주위로 조성된 화단에는 마치 생머리를 늘인듯한 버드나뭇과의 나무들이 바둑판 마냥 일직선으로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었고, 빨간 색을 좋아하는 중국답게 화단을 빨간빛이 돌았다.


  중국의 건물은 하나 같이 크고 웅장한데, 정부 청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선교사님이 내몽골에 있을 적에는 앞까지 아무나 진입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통제를 하는 모양이다. 정부 청사 앞의 작은 광장의 중앙에는 떳떳이 중국 깃발이 세워져 있었고, 바깥으로는 내몽골 자치구 70 주년을 기념하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동한 곳은 내몽골 국립대학교(Өвөрмонголын их сургууль)이다. 곳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한국 분들의 가정에서 점심 식사를 가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 학교를 들르게 되었다. 내몽골 국립대학교는 1957년에 설립되었으며 4개의 캠퍼스와 20개의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져있고, 23,000 명의 학생들이 재학하는, 내몽골 자치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심이 되는 대학교이다.





  본관 앞에는 몽골 비칙(босоо Монгол  бичиг) 한자를 병기하여 칭기스칸(Чингис хаан) 동상을 세워 놓았고, 캠퍼스 곳곳에는 내몽골 자치 70주년을 기념하는 팸플릿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아직 학기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특히 짙은 녹색 빛깔의 공원 호수가 내게는 인상이 남았는데, 사실 중국의 대부분의 호수가 녹색 빛깔을 띤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12시가 즈음 해서 우리는 가정에 도착하여 여자분이 차려주신 한국 음식을 먹었다. 분은 후흐 허트에 오기 전에 퉁랴오(Тунляо)에서 활동하셨다. 역시 몽골어를 외몽골에서 정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내몽골 사람들의 방언을 알아듣기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퉁랴오 지역은 내몽골 자치구에서 몽골인들이 가장 많은, 가장 많은 비율( 40%) 차지하는 지역인데, 그들의 몽골어 사정은 정반대로 가장 나쁜 곳이기도 하다. 얼마나 사정이 나쁜지는 나흘 뒤에 알게 같았다. 그들은 퉁랴오를 비롯해서 우리가 여행하게 지역에 사는 지인들을 위한 선물과 구호물품을 전달해 주기를 부탁했다.
 저녁에는 선교사님의 지인들과 내몽골 국립대학교 몽골학과 교수님 가정과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다. 먼저 약속 장소에 함께 한국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나는 다음날에서야 분이 한국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몽골어를 잘하는 한국 사람을 거의 적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몽골학과를 설립하신 이성규교수님과 함께 몽골국립대학교에서 몽골어를 배우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몽골 전통 레스토랑이었다. 교수님의 아내가 미리 예약해 두신 방은 게르 모양의 방이었다. 게르 안은 상당히 컸는데 외곽으로 테이블이 이어져 있었고, 중앙에는 10 정도가 앉을 있는 둥근 식탁이 자리했다. 벽에는 몽골 전통 가구들과 할린”(Халин)이라는 내몽골 여자 가수의 액자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나는 가수를 단번에 알아보았는데, 이는 내가 아는 내몽골 가수가 할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아내는 츠펑(Улаанхад)’ 출신의 내몽고 신문사 기자셨다. 역시 몽골인이였지만 분이 하는 몽골말은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다. 흡수골의 다르하드족이나 투바족이 하는 말도 이렇게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는데, 억양도 억양이지만 단어들의 모음들 간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특히 ’(Э) 들어가는 단어들의 모음을 ’(Ө) 발음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억양은 중국의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오래 전부터 투르크 민족의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당장에 구분할 없었다. 중국 동북 지역에 위구르(Уйгур)인들이나 다우르(Дагуур)인들, 혹은 만주족(Манжчууд)이나 만주 퉁구스계의 소수민족들이 다수 살기 때문에 이를 단지 중국어에서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특히 내몽골과 접하는 간쑤 지방(Gānsù Shěng) 춘추전국시대부터 여러 민족들(흉노, 월지, 오손) 집거했으며 무제 시대 이후 동서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실크로드의 간선 지대로 부각된 곳이기도 하다. 당나라 시대에 들어서는 한족, 몽골족, 티베트족 여러 민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천산 이북에서 위구르인들이 이곳에 진출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 간쑤 지방에 남아있는 위구르인들중 노란 위구르인(Шар уйгур)이라 불리는 소수민족이 존재하는데, 몽골의 현대 샤머니즘을 연구하는 헝가리 출신의 마티야스 발로그’(Matyas Balogh)라는 사람이, ‘노란 위구르인들이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몽골어를 구사하고 있는 영상을 유투브에 올렸다. 영상을 것은 내몽골 여행을 모두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였는데, 내가 내몽골을 여행하며 알아듣기 힘든 몽골어를 구사하는 내몽골 사람들의 억양과 상당히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원래 위구르인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하는데, 그들은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 투르크어보다도 몽골어에 훨씬 가까웠다. 그들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직관적인 인상, 이상으로 설명할 수가 없지만, 내몽골인들이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도 투르크화된 몽골인들이나 몽골화된 투르크인들에게서 언어적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