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호랑이의 멸절


조선 호랑이의 멸절은 단지 일제 시대의 해수구제 정책이라는 한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그릇이다. 조선 호랑이는 농지개간과 인간과의 갈등으로 서식지를 잃고 개체 수가 꾸준히 줄어왔다. 조선시대에 이미 갈 곳을 잃고 쓰러져 가던 호랑이는 일제시대를 거쳐 그 희미한 숨통을 잃어갔다.




[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2017/푸른역사

P31 호환

-정도전(1342~1398) 따르면 백성은 하늘이었고,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을거리였다. 하늘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 식량이었기에 조선은 식량을 가장 많이 생산할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조선에서는 이를 농사와 가축 사육이라는 생산경제 체제를 통해 성취할 있다고 믿었다. 중농 정책을 추진한 이유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논의 면적과 소의 마릿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가용공간을 확장하는 농지 개간은 야생의 공간에 생성되어 있던 야생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한반도 야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범과 표범에 맞서야 했다. 범과 표범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서식 영역을 지키려 했고, 사람들은 소를 이끌고 야생의 공간에서 농경지를 마련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소가 호랑이에 물려 죽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를 호환이라 했다.


P33 포호 정책

-15~16세기에는 천방-하천을 막아 물을 끌어대기 위한 수리시설의 일종-개발을 통해 냇가 무너미-범람원-땅이 대부분 경작지로 바뀌었고, 17~19세기에는 산록과 고산지대의 평탄지와 완경사 지역이 화전으로 개발되면서 범과 표범이 서식할 있는 땅이 더욱 크게 줄었다.
- 결과 나라에서 포호 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었던 호피 공납과 진상은 17세기에 호속목-조선시대 범을 잡아주는 대신 받아들인 면포-으로 바뀌었고, 18세기 초에는 결국 폐지되었다. 범과 표범이 사람들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독점적으로 이용할 있는 서식지가 거의 완전히 소멸하여 개체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P33 농본주의

-백성을 하늘로 삼는 민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 생산은 농본주의를 통해 실현될 있었고, 여기에는 농지 개간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농지 개간이 진전됨에 따라 서식지를 잃은 범과 표범이 사람과 충돌하는 호환이 빈발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은 국초부터 포호 정책을 실행했다.

P35 착호갑사

-...착호갑사는 범을 잡는 갑사라는 뜻으로 갑사는 태종이 고려 이래 세력가들이 양성하여 운영하던 사병을 혁파한 공병으로 개편한 고급 병종이었다. 국와 호위를 담당하는 고급 병종으로 시작된 갑사 처음 2,000 정도에서 점점 증가하여 성종 6(1475) 이후에는 1 4,800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숫자가 <<경국대전>> 실리게 되었다.
 착호갑사 존재를 처음 확인할 있는 것은 태종 16(1416)인데, 제도화된 것은 세종 3(1421)이었다... 성종 16(1485) 이르면 수가 440명이 되었다.

P38~40 착호군

-17세기 이래 지방에 설치된 병영에서도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사를 두었다. 백성들이 산포수라 부른 이들의 또한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평안도에는 많은 수의 착호군이 운영되었는데, 강계의 포수들은 발의 조총 탄환으로 범을 잡는 것으로 유명했다. 평안도에서 현종 15(1674) 5,000명이었던 착호군은 숙종 22(1696) 1 1,000 가량으로 늘어났다. 함경도에도 18세기까지 7,000 명의 산포수가 착호군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 군사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남병영의 중심 군사가 되었고, 수가 3만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P42 호피, 표피, 호속목제도

-...<<만기요람>> 따르면 임금에게 바치는 호피와 표피의 값은 정해져 있었다. 호피 장은 13 5( 1,200리터), 표피 1장은 20( 1,800리터)이었다. 이를 당시 최고의 기술자였던 궁시장의 품삯으로 환산하면 호피는 500, 표피는 750일의 임금에 해당했다...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포호 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고 강제하기 위해 모든 고을에 매년 3장씩 호피와 표피를 바치게 했다. 17세기에는 범과 표범이 없어 가죽을 바치지 못하는 고을에 가죽 값에 상응하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호속목 제도를 시행했다.

P43 방납 :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을 백성을 대신하여 나라에 바치고 백성에게서 높은 대가를 받아내던 .

-16세기까지 호피의 방납이 금지되었음에도 관행적으로 높게 책정된 호피의 값은 범을 사냥하지 못한 고을에서 부담했다. 범을 사냥할 있는 곳에서도 사냥으로 마련한 가죽을 다른 고을에 팔아 이익을 남길 있었다. 이렇게 작동되는 시스템에 의해 결국 조선에 사는 호랑이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P45~46. 무리한 호피공납

-인조 11(1633) 전라도 무안현감이었던 신즙(1580~1639)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이전까지 전국 대부분의 군현에서 1년에 범이나 표범을 잡아 바치도록 할당된 가죽의 양이 3장이라고 했다. 조선의 군현이 다소의 넘나듦이 있지만 대략 330 개에 달했다는 점에서 연간 잡아야 범과 표범의 수는 대략 1,000 마리였던 것이다.
 ...국초에는 나라에 받친 돌려받은 호피와 표피를 다시 바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국왕은 담당 관서에 호피와 표피를 바칠 때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완전한지 확인하게 했고, 특정 부위에 확인 도장을 찍어 두세 연이어 바칠 없게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200 년동안 매년 1,000 마리의 범과 표범을 잡아 가죽을 나라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초반 고을에서 3마리의 범과 표범을 잡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무안과 같은 작은 고을에서도 1~2마리를 잡는 것이 가능했다는 주장은 매우 시사적이다. 물론 16세기에 이르면 전라도에서는 평야의 모든 땅이 개간되어 나무 그루도 없는데 호랑이가 어디에 산다고 호랑이 가죽을 바치라고 하느냐며 호피 공납을 감해줄 것을 청하는 상소가 빈번히 올라오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호랑이 사냥이 너무 어렵다면서 호피나 표피의 진상을 감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초까지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호피와 표피를 마련하여 나라에 바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P48 개체 , 몽골 늑대, 멸절

-...매년 1,000 마리의 포획에도 2세기 이상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집단과 개체 수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수의 범과 표범이 필요할까? 암컷 개체 수만 3,000~5,000마리 가량이 필요하다수컷 1마리가 암컷 4~6마리 가량을 거느린다는 점과 도태되는 새끼들을 포함하면 출산으로 인한 변화가 적지 않겠지만, 대체로 4,000~6,000 마리가량의 범과 표범이 한반도에 살아야 했다고 추산할 있다.
 ...영조 즉위년(1724)에는 조선의 군현에서 매년 겨울 동안 범과 표범을 잡아 가죽을 바치게 하던 제도가 영구히 폐지되었다.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몽골의 초원지대에 주로 서식하던 늑대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해수구제 정책에 따라 압도적으로 많이 포획된 맹수가 바로 늑대였다. 이와 달리 범과 표범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부터 23 동안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였는데, 같은 기간에 잡힌 호랑이는 97마리였다. 연평균 호랑이 4마리, 표범 27마리 정도가 잡힌 것이다...




 한반도에서 100 마리 내외의 표범 개체군이, 20 마리 내외의 개체군이 번식하다 멸절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