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탕족 마을에서의 짧은 기록

 1764, 만주 올리아스테의 영사에서 기록된 문서에 다르하드(Дархад) 부족으로 보이는, Эүкэ(오르츠-Урц))에 사는 수렵민 22, 순록 192마리가 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 몽골에서의 차탕(Цатан)족에 대한 첫 기록이다. 그리고 2010년 인구통계조사에는 282명의 차탕족이 등록되었다. 현재 그들은 훕스골 아이막의 올랑올(Улаан-уул)’, ‘차강노르(Цагааннуур)’, ‘렌칭룸베(Рэнчинлхүмбэ)’, 바양주르흐(Баянзүрх)’, ‘한흐(Ханх)등의 솜에 거주하며, 본래 투바계 민족이지만 몽골화 되어왔다. 1936년부터 처음 차탕이라 기록되면서 차탕[1]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2017 8 21일 월요일 오후6시 나는 그곳이 얼마나 추울지도 모른 채 울란바토르에서 훕스골 아이막의 무릉시로 떠나는 도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흥이 많은 운전사의 금영노래방 기계과 함께(거리가 멀기 때문에 운전사가 2명이다) 14시간을 달려 다음 날 오전 8시 무릉시에 도착했다. 사전에 얘기된 차량이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남아 무릉시의 훕스골 아이막 지방 박물관을 방문했다.



[1] 차탕이란 몽골어로 순록을 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박물관의 자연관에서는 현존하는 사슴중 가장 큰 종으로 몽골의 쌍봉낙타보다도 크며 몽골에서 가장 큰 동물이라고 박물관의 해설사님이 주장하셨던 말코손바닥사슴과 지금은 멸종된 붉은 늑대의 박제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훕스골 아이막의 렌칭룸베’, ‘올랑올’, ‘차강노르’, ‘바양주르흐솜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다르하드족의 샤먼 의복이었다. 몽골의 대부분 인구를 차지하는 할흐족의 샤먼 의복과는 달리 다르하드 샤먼의 의복에는 뱀의 형상을 한 장신구가 치렁치렁 달려있었는데, 해설사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다르하드족의 샤머니즘은 지모신과 뱀을 숭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침엽수림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인 붉은타이가지대의 샤머니즘은 사방이 훤한 초원에서의 샤머니즘과는 벌써부터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곧 차강노르로 떠난다. 차강노르는 차탕족이 사는 많은 솜들 중에서도 몽골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나는 차강노르의 차탕족은 훕스골 호수 주변에서 관광업으로 돈을 버는 차탕족과 달리 순록유목생활을 그대로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다. 사실 나는 작년에도 훕스골을 왔었지만 당시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속의 행선지였던 차강노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훕스골 호수도 너무 아름다웠지만 좀 더 특별한 곳을 가고 싶었던 젊은 나에게는 너무 아쉬울 수밖에 없었고, 기어코 올해 다시 훕스골에 오게 된 것이다.


오후 1시 반, 아버지는 차탕족, 어머니는 몽골인인 푸르공 운전사 강저릭씨를 만났다. 무릉시에서 차강노르로 가는 차가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 외에도 그곳에 가야 하는 다른 사람들을 태워가야만 했다. 5명의 낚시꾼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할흐인들이었다. 그들이 차강노르에 가는 이유는 톨 자가스(Тул загас-우리나라에서는 타이멘이라 부르는)’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타이멘은 예니세이 강과 셀렝게, 아무르 강에 서식하는 대형 물고기로 그 길이가 보통 70~120cm, 몸무게가 15~30kg인데, 1943년 러시아에서 잡힌 가장 큰 타이멘의 기록은 길이 210cm, 몸무게 105kg이였다고 한다. 그들은 차강노르에서 일주일 이상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가는 길에 우리를 위해서 사슴돌 군집지(Буган хөшөөний цогцолбор)를 들린 후 곧장 차강노르로 직행했다. 요 몇 일 동안 비가 내리는 바람에 길이 매우 안 좋아졌다. 사실 길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도로가 아닌 초원과 숲, 바위, 산으로 다녔기 때문에 원래부터 쉬운 길은 아니었다. 차강노르는 무릉시로부터 불과 300km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하루를 꼬박 넘기고 다음 날 오전 9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무려 19시간을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보낸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자는 동안 창문에 머리를 얼마나 많이 박았는지 머리에 난 혹이 볼록 솟았다.
차강노르에 도착하고 사전에 준비한 국경 타이가 지대 출입 허가증을 여권과 함께 국경수비대에 제출했다. 심사를 하는 동안 마을 너머에 산들을 보는데, 그 꼭대기에 만년설이 쌓여 있는듯했다. 그래서 운전사 강저릭에게 저것이 만년설이라고 물었는데, 만년설이 아니라 어젯밤 눈이 내려 쌓인 것이라고 했다. 흡수골에서는 어느 계절이나 눈이 내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마을 너머의 눈이 쌓인 산들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추웠다. 패딩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작년에도 이맘때 흡수골 호수를 다녀왔기 때문에 그 때의 날씨를 생각하고 왔으나 그곳의 추위와는 또 차원이 달랐다. 우리나라의 초겨울과도 같은 날씨였다. 실제로 그곳 온도는 영상과 영하를 왔다 갔다 했다.
마을에서 10분 정도 더 들어가 한 다르하드 가정이 운영하는 게르 캠프에 짐을 내려 놓았다. 캠프는 차강 호수에서 걸어서 2분도 채 되지 않는 초지에 위치해 있었다. 캠프의 주인은 아버지가 다르하드족, 어머니는 차탕족인 중년 사내로 할흐 출신 아내와 두 자식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캠프를 운영한지는 1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 몽골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을 맞는 것은 더더욱 처음이라고 말했다.
차강노르의 시내에 사는 주민 대부분은 다르하드족이었다. 캠프주인 역시 다르하드 방언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할흐족의 말과는 억양이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대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어머니가 할흐 출신이라 다르하드 방언의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원래 계획은 캠프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타이가 숲으로 떠나 차탕족을 만나러 가려 했으나, 캠프 주인은 길이 안 좋아 비교적 늦게 도착했고, 장시간 차 안에서 고생했으니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을 권장하셨다. 나는 젊은 마음에 생각보다 그리 피곤하지 않아서 원래 계획대로 바로 떠나고 싶다고 했지만 왠 일인지 주인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차강 호수와 초지의 풍경은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솔직히 낮 내내 그곳에서 할 것이 없었다. 그러자 캠프 주인은 차강노르 주변의 산으로 말을 타고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냐고 했다. 산에 야생 블루베리가 지천이니 따 먹기도 하고 내일 아침 차탕족이 사는 마을에 장시간 말을 타고 다녀와야 하니 내일 타야 할 말에 적응도 하는 겸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우리는 그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캠프 안 주인이 해 주신 점심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면서 피로를 풀었다. 한 두 시간 자다가 인기척에 일어나 게르 밖으로 나가보니 마부 2명이 3마리의 말들을 끌고 와 나무기둥에 묶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커 보이는 청년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눴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그의 나이는 열여덟, 이름은 오강바야르, 차강노르에 태어나 평생을 이 곳에서 자라왔고 근방에서 야크와 양을 돌보는 목자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올해부터 관광객들을 위한 마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다르하드족의 인구는 2010년 통계 기준으로 21558명으로 몽골 내에서는 오량하이(Урианхай)족 다음으로 8위를 차지한다. 특히 그들은 몽골의 샤머니즘의 관습과 의식이 가장 잘 남아있는 민족이라고 한다. 흔히 몽골인들이 훕스골 아이막의 샤머니즘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진실된 샤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이야기들 하는데, 바로 이 다르하드인들의 샤머니즘을 두고 하는 말이다. 32개의 성씨가 존재하며 그들은 대개 몽골족과 투르크족의 결합된 종족으로 간주되는데[2], 그 중 몽골계의 하르 다르하드(Хар Дархад)는 할흐인과 동시베리아의 한 종족인 함니간인[3](Хамниган)이 결합되어 탄생한 종족이다.
다르하드인들이 훕스골 지방의 소수민족으로 남게 된 경위는 이렇다. 1206년 서쪽은 버르치 장군(Хүлэг Боорч), 동쪽은 모홀라이 장군(Мухулай)이 다스리고 있을 때, 다르하드인들은 다른 부족들과 섞이다가 한 부류는 알타이(Алтай), 항가이(Хангай), 훕스골의 삼림으로, 다른 부류는 셀렝게강(Сэлэнгэ мөрөн) 에서부터 동쪽으로 오논(Онон) 강 까지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고 1270년 쿠빌라이(Хубилай)가 왕위에 올라 칭기스 한(Чингис хаан)이 입었던 옷과 게르 궁전(Өргөө гэр)을 오르도스(Ордос) 지방에 장례를 치러 안치시키도록 했는데, 칭기스 한의 무덤을 영원히 보호하기 위해 동쪽과 서쪽 지방에서 500 가정을 그곳으로 함께 이주시켰다. 그들이 바로 샤르 다르하드(Шар Дархад)샤르노드(Шарнууд)’, ‘오량하이’, ‘먕가드(Мянгад)인들이었다. 그리고 적은 수의 다르하드인들이 지금의 외몽골에 남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지금의 훕스굴 아이막의 서쪽 지방에 흩어져 사는 하르 다르하드인들이다.
실제로 마부 오강바야르가 구사하는 다르하드 방언은 내가 아는 몽골어보다도 훨씬 딱딱하게 들렸는데, 작년 바양울기 아이막에서 들었던 카자흐어 억양과도 조금 비슷하게 들렸다. 투르크화된 몽골인이나 몽골화된 투르크인들에게서 투르크어계의 비슷한 억양이 들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만날 차탕족과 다르하드인의 대화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2] 555년 투르크 왕국의 세 번째 군주인 키긴(Кигинь)이 타간-사얀(Тагна-Соён) 지방에 거주하던 많은 종족들을 지배하게 되면서 다르하드인들은 그들의 관할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바이칼 호수부터 흡수골 호수까지 이르는 타이가지대에서 오르츠에 거주하고, 사냥을 하며 순록과 야크, 소를 기르는 삼림 부족들(ойн иргэд)중 하나로 불려져 왔다.
 대표적인 성씨로 하르 다르하드’, ‘오하 다르하드(Ухаа Дархад)’, ‘샤르노드’, ‘바르노드(Барнууд)’, ‘천드(Чонод)등이 있다.
[3] 바이칼(Байгаль нуур) 북동 지역의 셀렝게와 오논 강 부근으로 이주한 퉁구스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호리 부랴트인(Хори Буриад)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부분의 함니간인은 내몽골 후룬베이얼(Хөлөнбуйр) 아이막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몽골의 더르너드(Дорнод) 아이막, 헨티(Хэнтий) 아이막, 러시아의 부랴트 공화국과 자바이칼 지방에 살고 있다. 위키피디아 러시아<Хамниганы>

 야생 블루베리를 따러 숲을 지나 산으로 들어갔다시냇물이 차올라 말이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1시간 정도 올라갈 즈음 어제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즈음 더 가다가 오강바야르가 잠시 멈추더니 말을 매고는 숲을 가리켰다정말로 야생 블루베리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추운 밤을 지새고 날이 밝았다. 오강바야르가 다시 말을 끌고 왔다. 날씨가 몹시 흐렸다. 동료가 우비를 가져오지 않아 내 우비를 주었다. 내 겉옷이 그나마 방수가 잘 되었기 때문이다. 2시간 정도 초지를 지나고 언덕을 넘으니 타이가 숲이 펼쳐졌다. 몰아치는 비바람과 범람하는 시냇물로 온몸이 온통 젖어가며 산을 올랐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사람과 짐을 싣고 걷는 몽골말의 체력과 끈기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3시간 반쯤 되었을까 50대 정도로 보이는 차탕족 사내가 뒤에 3~4 마리의 순록을 이어 맨 채 순록을 타고 오고 있었다. 오강바야르와 다르하드 방언으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시 길을 떠났다. 산을 오르고 내리며 가는 길 옆으로 드문드문 오르츠가 보인다. 차탕족은 이동할 때 오르츠의 뼈대가 되는 자작나무(Хуш)를 그 형태 그대로 남기고 떠난다.


예전부터 그들이 살아온 거주 양식은 오르츠(투바어로 Еүке)이다. 오르츠는 유목민과 수렵민 집단의 가장 초기의 거주 양식이다. 오르츠는 지붕에 끼우는 얼개 막대(алаадже), 덮개(алхе)로만 구성되었고 예전에는 자작나무와 나무껍질을 사용했으나, 20세기 초부터는 천막과 가죽, 방수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르츠 한 채에 3개의 문짝(4~5m 높이, 2~3m 넓이) 2, 3개의 지붕덮개(3~4m 높이, 2~3m 넓이)를 사용하며 가정의 크기에 따라 그 개수는 각각 다르다. 덮개를 두른 후 7~8개의 긴 나무로 고정시켜 바람을 막는다.


출발한지 5시간 정도 지나서야 차탕족의 마을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에는 수백 마리의 순록들이 흩어져 풀을 뜯고 있었다. 그 중 다수의 순록들이 뛰어가지 못하도록 발이 묶인 채로 걷고 있었다. 사슴과 동물이 인간에 의해 길러진다는 것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순록은 사슴과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가축화 된 동물이다. 그리고 초지 오른편의 산 중턱으로 드문드문 차탕족 몇 명이 보였다. 질퍽거리는 숲을 지나 마을에 다다라 한 차탕족 여인의 오르츠에 들어가 순록의 젖을 끓인 수테차(сүүтэй цай)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빵과 순록의 젖으로 만든 치즈(бяслаг)를 먹으며, 차탕 여인 통가에게서 이 마을에 몇 개의 가정과 몇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마을은 중 타이가(Зүүн тайга)지대의 우즈깅 샤르자스(Өжгийн шаржас)라는 마을로 가을 목축지(намаржаа)이며, 21~22가정에 100 남짓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바롱 타이가(Баруун тайга)[1]에 사는 차탕족의 숫자도 여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요즘 오르츠의 얼개 막대를 자작나무가 아닌 시베리아 피나무(Хар мод)에서 구한다고 말했다.





[4] 여기서 ’(Зүүн)이란 몽골어로 왼쪽, 동쪽을 의미하며, ‘바롱’(Баруун) 오른쪽, 서쪽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오른쪽을 동쪽, 왼쪽을 서쪽으로 보지만, 몽골인은 반대로 오른쪽을 서쪽, 왼쪽을 동쪽으로 본다. 그래서 나도 타이가라고 했을 , 당연히 몽골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이해했으나 사실 마을은 지도상 차강노르 솜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했었다. 나중에 사실이지만 다르하드인들은 보통 몽골인들과 달리 우리처럼 오른쪽을 동쪽, 왼쪽을 서쪽으로 본다고 한다. , 여기서 타이가 차강노르를 기준으로 타이가지대를 의미한다.


 순록의 젖으로 만든 수테차와 치즈는 양의 것으로 만든 것보다도 일반인들에게 훨씬 거부감이 덜 느껴지는 맛이었다. 특히 치즈는 바로 그대로 시중에 팔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오강바야르와 통가는 다르하드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몽골어 할흐 방언을 공부한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그들의 대화는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할흐 방언으로만 배워 온 나에게 다르하드 방언은 안 그래도 알아듣기 쉽지가 않았는데, 더군다나 본래 투바어 방언을 사용하는 차탕인이 구사하는 다르하드 방언을 듣고 있자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투바어를 할 때와 오강바야르가 다르하드 방언을 구사할 때의 억양이 조금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장화를 챙겨오지 않은 것은 패딩을 챙겨오지 않은 것보다도 더 큰 실수였다. 통가가 제공한 빈 오르츠에 들어가 불을 지핀 후,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 불가에 널어 놓았다. 불을 지피자 오르츠 안에 연기가 다소 차기 시작했다. ‘사스 캐리(Sas Carey)’의 수필 내 마음속 순록 유목민들이라는 책에서는 차탕족의 오르츠에 대해 연기가 잘 빠져나가는 인디언들의 오르츠와 달리 차탕족의 오르츠는 빠져나간 연기가 다시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천장막이(утааны нээлхий)가 없어 연기가 잘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몸을 말리며 쉬다가 오후 4시쯤 나가보니 초지에 나간 순록들이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차탕족들이 각각 수십 마리의 순록들을 데리고 오르츠 근처의 산 중턱에 두는데 사실 구태여 산 중턱으로 몰지 않아도 순록들이 스스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들이 기르는 순록들은 더위에 매우 약하며, 춥고 높은 곳에 훨씬 잘 적응한 동물이다. 그들은 -31~-50도에 달하는 춥고 고된 기후 조건 속에서 칼 바람을 거스르며 풀을 뜯는다. 그들이 더위와 함께 가장 싫어하는 것이 모기인데, 그 모기들로부터 피하기 위해 자신의 체온을 낮춰야 하기 때문에 고산 지대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5] 순록의 본성을 이용한 방법 외에도 다른 방법이 함께 사용되는데, 그들처럼 순록과 함께 유목생활을 했던 17세기의 퉁구스족들(Тунгус)을 예로 들자면,. 그들은 평상시에 오르츠 한 두 채에 가족으로 구성되는 작은 군락 생활을 하지만, 여름에는 같은 씨족의 가족들이 약 12개의 천막으로 구성된 주거지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연기 나는 불로 해충들을 제거해 순록떼를 보호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6]



[5] 이성규, 유목의 낙원에서 사라지는 순록들, <시사저널>, 2005.09.30.
[6] James Forsyth, “A history of the peoples of Siber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66.



이 마을에는 두 명의 샤먼이 산다고 했다. 한 명은 여성이고 한 명은 남성인데, 먼저 생체첵이라는 여성 샤먼(Удган)을 찾아 보기로 했다. 그녀의 것으로 추정 되는 오르츠에 가 보니 그녀의 친척 동생이 강 건너편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있다고 했다. 건너가 보니 마을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순록의 뿔로 만든 수공예품들을 늘어 놓고 팔고 있었다. 이곳에 우리 외에도 독일이나 캐나다, 중국 등에서 온 여행객들이 있었다. 사실 나는 차탕족 마을에서 수공예품을 파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무릉시나 훕스골 호수 근처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라 생각했다.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이 깊은 오지에까지 닿았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1990년대 한동안 외국의 회사나 상인들이 차탕족이 기르는 순록의 뿔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차탕족은 순록의 뿔을 팔기 위해 순록의 뿔을 잘랐는데 수컷 순록은 뿔이 잘리면 생식 기능이 떨어지고 박테리아 감염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이 순록의 개체 수가 감소하는데 큰 일조를 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순록의 뿔을 자르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순록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차탕족은 흡스골 호수 등 관광지로 떠나 순록을 태워주고 사진을 찍게 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하지만 훕스골 호수는 순록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모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실제로 순록의 개체 수는 90년대 이후로 3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수공예품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샤먼 생체첵씨가 다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 강을 건너 그녀의 오르츠에 들어갔다. 그녀를 만나고 보니 마을에 들어와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분이었다. 나이는 51세로 다른 평범한 차탕족들과 마찬가지로 순록을 기르며 살고 있다. 다르하드 방언을 구사하지만 젊은 차탕 사람들만큼은 잘 구사하지 못하셨다. 나는 그녀에게 차탕족들이 투바어를 잊지 않고 사용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10대 아이들부터는 투바어를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차탕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몽골어(다르하드 방언)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투바어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했다. 샤먼 생체첵 자신도 그런 현실이 몹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을 토박이로 차강노르와 무릉시, 다르항(Дархан) 시 외에 다른 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의식은 아주 드물게 행하며, 필요에 의해서만 행한다고 했다. 의식은 볼 수 없었지만 대신에 샤먼의 무구들을 꺼내 보여주셨다. 새의 깃털이 달리고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모자와 새의 발모양의 지팡이, 장신구가 달린 무거운 의복과 거울, 북과 북채가 있었다. 또한 구금(аман хуур)이 있었는데 샤먼 생체첵씨는 이가 없어서 그것을 다룰 수 없어졌다고 말했다. 나도 구금이라는 악기를 배워본 적이 있어서 소리를 내어보니 좋아하셨다.
비록 그들이 점점 투바어를 잊어가지만 자신들이 투바인이라는 민족정체성은 매우 확고해 보였다. 차탕이라는 민족에 대한 기록을 조금 살펴보자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오량하이변경지대에 어인(Ойн),’ 살리드조크(Сальджук)’, ‘터즈(Тож)’, ‘(Та), 혹은 몽구쉬(Монгуш)’, ‘베이스(Бэйс)’, ‘마트(Маат)’, ‘니바즈(Нибаз)’, ‘허조트(Хозут)’, ‘(Шал)이라는 아홉 허쇼(Хошуу-행정구역 단위) 만주의 지배에 넘어가면서 토즈허쇼에 위구르-차탕(Уйгур-цаатан)민족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위구르인의 기원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학자들의 통일된 의견이 없었다. 라시드 앗딘(Рашид-Ад Дин)집사(Судрын чуулган)에 처음으로 순록과 소를 목축하는 숲의 오량하이인(Ойн урианхайн иргэд)”, “숲의 오량하이 집단(Ойн урианхай аймаг)이라고 기록되었으며, 순록을 기르는 오량하이인을 몽골의 오량하이와 구별하여 투르크어계 민족이라 보았다. 차탕족은 그들 스스로를 투바혈통의 토즈 허쇼에 사는 위구르-오량하이라고 부르며, 그들은 홀라르(Хуулар)’ ‘오로드(Уруд)’, 서르스(Сорс)’, ‘다르갈랑(Даргалан)’, ‘카쉬탁(Каштаг)’, ‘발가쉬(Балгаш, 혹은 Балыкчи)’, ‘뎀제(Дэмжээ)’, ‘더더트(Додот)’, ‘서연(Соён)’, ‘저트(Зоот, 혹은 Жогд)’, ‘헤르득(Хэрдэг) 11개 씨족으로 나뉜다. 하지만 현재 학자들은 그들을 위구르-오량하이가 아닌 서여드 오량하이(Соёд Урианхай)라 부른다-서여드란 흡수골 오량하이족의 성씨로, 이 지역 북쪽을 두르는 사얀(그들 말로 서연)산맥과 관련이 있는데, 서연이란 위구르어로 숲과 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의미이다.
 투바의 테르-(Тар-Хөл)이라는 솜(행전단위 군에 해당)다르하드텡기스(Тэнгис)’, ‘쉬쉬기드(Шишгид)강가의 초지에 있다. 그곳에 거란, 위구르 제국 시대의 군대 요새나 성 같은 유적이 있는데, 이는 그곳이 위구르와 거란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 점 때문에 차탕족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보통 위구르계 민족이라 말하는 인습이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차강노르의 중 타이가에 사는 지금의 차탕족들은 자신을 투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스 케리가 2003년 이후로 수 차례 차탕 마을을 방문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을 투바인 혹은 도하(Духа)라고 부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와 그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 강바라는 샤먼을 만나러 가보려고 했으나 그의 집 주위로 국경 수비대가 밀어 닥쳤고 그들은 강바 씨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빠 보여서 저녁에 찾아 뵈기로 하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통가 씨가 고릴태 슐[7](гурилтай шөл)을 끓여서 가져오셨다. 고릴태 슐에는 보통 양고기가 들어가지만 차탕족 마을에서는 순록의 고기가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통가씨에게 이 고기가 순록의 고기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의 답을 주었다. 양고기라는 것이다. 차탕 족은 순록의 고기를 먹지만 상시로 잡아 먹지 않고, 가끔 나이가 들은 순록만 잡아 먹는다고 말했다. 대개 차강노르 마을에서 양고기를 사와 말려서 육포를 만들어 국을 끓여먹는다고 했다. 그들의 순록을 아끼는 마음이 정말 각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객들이 순록을 타는 것을 자주 요구하느냐고 물었다. 자주 요구하지만 차탕 사람들은 남을 순록에 태우는 것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말보다도 체구가 작기 때문에 체중이 무거운 사람이 타면 순록의 허리가 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을 돈을 받고 태워준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차탕 마을에서 벗어나 흡스골 관광지를 가면 많은 여행객들이 순록을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기도 한다. 그러한 관광 패키지가 이미 잘 만들어져 있어서 특히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온 여행객들이 이를 즐기는데, 순록에게 있어서는 정말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바 씨는 계속 바빴다. 내가 강바 씨를 찾아갔을 때에는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였다. 대부분의 오르츠에서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는데 강바 씨의 오르츠 안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독일에서 온 사진가 2명과 그를 이끌고 온 몽골인 한 명, 국경 수비대원들 2명이 앉아 있었다. 국경 수비대원들이 곧 나가고 나는 강바씨와 말을 붙여 보았다. 그는 58세로 바롱 타이가(Баруун Тайга)’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20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샤머니즘 의식에 대한 질문을 해보았지만 그는 연신 파이프담배를 피워댔고 내가 하는 질문에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피곤해서인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마을에 이렇게 국경수비대가 많은지 물어보았다. 차탕 마을에는 국경수비대가 상시로 경비를 선다고 말했다. 몽골에서 러시아 국경을 폐쇄한 이후로 사냥꾼이 사냥할 있는 범위가 좁아짐으로 인해 가축 도둑이 늘었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국경수비대가 항상 이를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마을을 대표하는 어른 명인 강바 씨를 국경수비대나 여행객들이 많이들 찾는 모양이었다.
다음 ,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다음주 월요일까지 내몽골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지가 않았다. 차탕 사람들과 사진을 남기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그네를 타며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순록을 몰고 숲으로 떠나거나 뿔을 조각하며 여행객들에게 수공예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통가씨의 집에 있는 태양력 전지가 소진되는 바람에 핸드폰을 충전하기 위해 다른 가정에 들어갔다. 날씨가 워낙 흐려서 태양력 전지가 충전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가정에는 태양력 전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여덟 남짓 되었는데, 중에 딸이 델을 입고 짐을 싸고 있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울란바토르에 간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차강노르 마을까지 순록을 타고 가서 우리가 무릉시에서 차강노르에 것처럼 푸르공이 구해지는 대로 무릉시에 것이라고 말했다.



[7] 우리나라의 칼국수와 비슷한 음식으로 고기가 들어간다.



핸드폰을 충전하는 동안 그들이 순록의 뿔을 조각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집주인의 손가락이 보기 힘들 정도로 상처가 많았다. 밖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자 추위를 피하려는 개가 오르츠에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매몰차게 개를 쫓아내 버렸다. 그들이 그는 개는 라이카(Лайка)라는 품종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사냥개로 쓰이는 개이다. 차탕 마을에서는 순록을 지키는 용도로 라이카를 기른다고 한다.


 비가 잠잠해지고 우리는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3시간쯤 지나자 평지가 나왔고, 말들도 신이 나는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한참을 달리고 잠시 오강바야르에 아는 가정에 들리려고 하는 데도 말들은 계속 달리고 싶어했다. 집에 가까이 왔다는 걸 말들이 우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가정 역시 다르하드인들의 가정이었고, 소고기를 통째로 끓여먹고 쉬던 중이었다. 허기를 채운 뒤 1시간쯤 더 달려 캠프에 도착했다. 그렇게 차탕 마을 여행은 마무리 되었다.


<투바어 차탕 방언>
1.     Сайн байна уу = Э кү ва
2.     Баярлалаа = Өдөм
3.     Баяртай = Баялан
4.     Би = Мэнд
5.     Та = Сэн
6.     Чи = Хирал
7.     Маргааш = Датаа
8.     Энэ = Дэ
9.     Тэр = Жэ
10.   Хүн = Гиш
11.   Аав = Ажам
12.   Ээж = Авам
13.   Ах = Хагам
14.   Эгч = Өвам
15.   Явах = Жоруулдай, Явж байна = Жоровдүр, Явна = Жоруул, Явсан = Жорон
16.   Цаа = Ив

참조
1.     Хондогынхон Базаррагчаагийн Баярсайхан, “Монгол хэлний талбар толь”, УБ, 2011.
2.     Б.Баатархүү, “Монгол улсын Тувачууд”, УБ, 2017.
3.     Чойбалсангийн Буянбадрах, “Монгол орны лавлах”, Guide төв, 2012.
4.     이성규, “유목의 낙원에서 사라지는 순록들”, <시사저널>, 2005.09.30.
5.     James Forsyth, “A history of the peoples of Siber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6.     Sas carey, “Reindeer herders in my heart”, Wren Song Press, 2012.